Prologue1 : 황제의 길

TRPG/제 13시대

2021. 1. 18.

320x100
반응형

 

 

제 13시대 - 황제의 길 : Prologue1

 

 

13시대 1230년 열의의 달 10일.

용제국의 황제, 바실리 스테판 타치야나의 재위 30년이었다.

 



제국은 지금 황제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대회에 이목이 쏠려있다.
황자와 황녀, 후궁의 자식들인 서자들, 황실의 계보(系譜)에 오른 친척들과 입양 자식들. 대회에 참가하려는 자들은 무척 다양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은 혈통. 그것만은 분명했다.


 

황궁으로부터의 초대장

이곳은 칼끝 반도 어딘가의 드높은 절벽 아래.
흰 새가 날아다니는 청명한 하늘 아래에, 에메랄드빛 눈을 가진 금발의 하프엘프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거친 내륙해의 바다는 오늘따라 잠잠하기 그지없었고, 덕분인지 수확도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낚싯줄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일은, 낚시에 익숙한 그에게도 고역이었다.


그는 졸음을 쫓기 위해 받침대에 낚싯대를 세워둔 채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달아날 잠이 아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뺨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액시스에 들렸을 때 받아온 편지가 생각이 났다. 늘상 받던 시시껄렁한 익명의 러브레터나 용병 구인(求人) 글이라고 생각해 무시하고 있던 편지였다. 지금은 그런 편지라도 읽는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가 편지를 펼치자, 머리 위를 맴돌던 흰 새가 머리 위에 앉았다.

"응, 피요르. 너도 같이 보고 싶구나?"

 


초대


아나스타샤 캄랜드, 해당 초대장을 지니고 황제의 후계자 선발대회에 참가 바람.
본 초대장은 적법한 절차를 통해 검증된 후보에게 보내는 것임을 알리는 바이다.


참가 장소 : 황궁 용비늘 연회홀
참가 일자 : 430년 열의의 달 15일
10:00


 

"이게 무슨…… 장난이라기엔 내지의 종이가 너무 고급스러운데. 거기다 이거, 진짜 금박인가?"

고작 한 번의 장난을 위해 이 정도 돈과 정성을 들이는 미친 자는 없을 것 같았다.

"황제의 핏줄이라……."

어렸을 적,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너는 왕의 딸이라든가 공주님이라든가.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용 제국 용 황제의 딸이라든가 황자라든가.
그냥 그런 얘기였다. 점차 나이를 먹어가며, 부모님이 자신을 그 정도로 귀하게 여긴다는, 일종의 비유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그의 어머니가 한 말들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비 없이 크는 딸이 안쓰러워, 황제의 사생아로라도 포장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 농담 같던 말이 사실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황족이 된다는 건 모든 이들이 바라는 꿈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 역시 그랬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까지처럼 떠돌이 용병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며, 인간들에겐 엘프라고 엘프들에겐 인간이라고 배척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아나스타샤가 대회 초대에 응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콰앙——!!

엄청난 소리를 내며 무언가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
굉음에 깜짝 놀랐지만 우선 떨어진게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몬스터라면 곤란하니까. 아나스타샤는 연기를 헤치고 다가갔다.

말이 죽어있었다.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산산조각 나 죽어있었다.


절벽은 500m는 족히 넘을 거라 예상되는, 산맥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높이였다. 저런 꼴이 되지 않는 쪽이 더 신기하다고 할 수 있겠지

'바보같이 앞만 보고 달리다 추락하기라도 한 모양이지.'

아나스타샤는 말의 머리였을 조각에 고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의 위에 누군가 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요즘같이 언데드가 창궐하는 때에는 화장을 해야 뒤에 탈이 없다지. 불쌍하니까 나라도 시체를 수습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주자.'

시간이 지나 연기가 개이며, 다른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붉은색. 흐르는 피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이게 무슨…
"

절벽 위에서 떨어진 것이라곤 생각 못할 정도로 시체는 깨끗했다. 잠들어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시체로 추정되는 것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따뜻했고, 심장이 뛰었고, 그리고………

"아직 살아있어!"

살아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절벽 아래의 은신처에 붉은 머리의 사람을 뉘였다. 그리곤 옷의 흙을 털어내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은 평범한 셔츠와 승마용 가죽 바지를 입은 남자였는데, 흔하게 볼 수 없는 외모였다. 잘 정돈된 짧은 머리에 깨끗한 피부, 짙은 눈썹과 속눈썹, 높은 콧대, 겉으로 얼핏 보아도 탄탄해 보이는 근육……. 인간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남자를 머리부터 쓱 훑어보다가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곤 고개를 휘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훑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뺨을 치며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달아났던 피요르가 은신처로 돌아왔다. 피요르는 남자의 머리 위에 올라가 볼을 부리로 쪼기 시작했다.

"하지마, 피요르."

그 자극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자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신음 끝에 눈을 뜬 그는, 머리 위의 피요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요르는 경계하지 않고 그의 손 위로 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아나스타샤는 남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깨어나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에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찌나 강렬하게 쳐다보던지 아나스타샤는 말하다 머쓱해져 눈을 피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남자는 아나스타샤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것 같았다.

"저를 구해주신 분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레이디가 무척이나 아름답기에."

아나스타샤는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아름다워? 레이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뭐하는 인간이람!'

그 남자는 아나스타샤를 다시 한 번 '레이디'라고 불렀고,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그렇게 불리지 않기 위해 서둘러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소개를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눈이 커지더니, 서둘러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클라인 카스펜서입니다. 아나스타샤, 제가 당신을 식사에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은인에게 보답하고 싶습니다."

클라인의 집은 액시스(Axis)에 있다고 했다. 칼끝 반도에서 액시스까지는, 빠르게 걸어간다 해도 꼬박 하루는 걸렸다.

 

마침 선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액시스에 가야 했던 아나스타샤는 그의 초대를 승낙했다.

 


 

클라인 카스펜서

클라인은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나스타샤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격식을 갖추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은인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평범한 행색에 비해 흘러넘치는 기품이 예사롭지 않았다.

왠지 그에게는 액시스 뒷전의 술집에서 하는 농담 따먹기나 욕지거리를 할 수 없었다.

 

고지식하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불량한 쪽은 아나스타샤일 것이다. 그가 지금껏 친하게 지내 왔던 사람들은, 액시스의 시정잡배들이나 용병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클라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교양 있고 친절해지기가 낯설고 어려워서 그렇지, 그것이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아마 아나스타샤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던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남쪽 주둔지로 이어진 관문을 지나서며 클라인의 얼굴을 보고선 통행증을 보지도 않고 제일 먼저 통과시켜주는 문지기─심지어 경례까지 하더라!─와 기사단, 사신(使臣)들이 거주하는 북쪽 주둔지를 가로지르는 통행, 그리고 도착한 곳은……

"궁전… 지구에 사시나 봐요?"

떨떠름해하는 아나스타샤의 질문은, 요컨대 그거였다. 궁전 지구에 살 만큼의 부자였냐는 의미.

 

액시스의 궁전 지구는 그냥 부자가 아니라 귀족이나 귀족쯤 되는 부자여야지 살 수 있는 구역이다.

 

최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뒷전 지구에서 평생을 전전하며 살아온 아나스타샤는, 기득권의 착취에 대해 늘 분노했다. 그들을 경멸하고 질투해 왔다.

 

어쩌면 그 질문에는 순수한 궁금증뿐 아니라, 그런 감정이 조금이나마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클라인은 아나스타샤의 싱숭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쾌하리만큼 빠르고 깔끔하게 긍정했다.

 

오히려 당황한 건 아나스타샤였다.

 

그가 부자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노동자 계급을 착취해서 번 돈으로 쓸데없이 젠 채 하고, 불결하단 이유로 시궁쥐 둥지에 불을 질러 새끼까지 태워 죽이듯이 뒷전을 밀어버리고,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자원을 낭비하는……….

 

클라인이 그럴 사람인가? 솔직히 모른다. 베푸는 사람인지도 착취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게 당연하다. 아직 만난지 하루밖에 안 됐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떨쳐버리고 모처럼 오게 된 궁전 지구를 구경하기로 했다. 이런 상류층 거주지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액시스에 지내면서도 와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번쩍번쩍한 거리와 저택들을 둘러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쩌면 클라인의 집도 저런 저택일지도 모르겠다.

고작 저택일 뿐인데도 어찌나 볼거리가 많았는지, 그는 클라인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며 걷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백작님."

백작님?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택의 고용인들이 백작님이라고 한 건가?'


하지만 아나스타샤와는 달리 클라인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내 손님이다. 이 분은 내 은인이니 극진히 모시도록."

클라인은 아나스타샤에게 피곤할테니 식사 때까지 편히 쉬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신을 불러달라고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300x250

 

카스펜서 가문의 하녀들은 아나스타샤를 방으로 안내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고급스러운 욕조에 향기로운 입욕제를 풀어 그를 목욕시키는 일이었다.

목욕에는 아나스타샤의 반려 새인 피요르와 함께 했다. 하지만 피요르는 입욕제가 풀어진 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깃털을 부풀려 털어내고는 욕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목욕 후에는 원래 그의 옷보다 좋아 보이는 목욕가운을 하녀들이 직접 입혀주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아나스타샤가 입고 있던 얇은 가죽 갑옷이 개켜져 있었고, 새 셔츠와 바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원래 그가 입고 있던 뻣뻣한 저가 린넨(Linen) 과는 다른 부드러운 실크 셔츠였다.


하녀들이 물러나고 아나스타샤는 가운 채로 침대 위에 누웠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푹신함이다. 기분 좋은 느낌과 새 이불의 냄새…. 오랜만에 찾아온 안정감에 눈꺼풀이 절로 감겨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문 밖에서 들리는 하녀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안내받은 곳은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다양하게 차려진 큰 테이블이 있는 식당이었다.

 

평소엔 통밀빵, 가끔 잘 먹어봐야 돼지고기를 넣은 통밀빵 정도가 주식이었는데, 지금 이 식탁은 지금껏 먹었던 음식들은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비교도 안되게 화려했다.

 

음식이 도망가는 것도 아닐텐데도 왠지 모르게 조급해진 아나스타샤는 의자에 서둘러 앉았다.


의자에 앉고 나서야 클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간편한 복장과는 달리 소매 끝이 금실로 수놓아진 셔츠와 쪽빛 색의 섬세한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어울렸다. 저게 클라인의 원래 모습이겠지.

"식사 초대를 해주셨을 때 이렇게 대접받으리란 건 생각도 못했어요. 제가 드린 도움에 비하면 과한 선물이에요. 음…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자신이 차릴 수 있는 격식을 다해 말했다.

"아뇨, 저야말로 이런 것 밖에 해드리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그러니 꼭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그냥 제 친구인 피요르가 먹을 채소 좀 챙겨주세요. 그 외엔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선발 대회 직전까지 머무를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럼 며칠간 더 머물러도 될까요?"


"네, 며칠뿐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든지 필요하다면 머무셔도 괜찮습니다. 지금 쓰시는 방은 아나스타샤를 위해 항상 비워놓고 있겠습니다."

더 머무른다는 말에 클라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아나스타샤는 클라인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용히 감사하다고 읊조렸다.

 



아나스타샤는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깨끗하게 세탁된 옷으로 갈아입고 활을 손질했다. 나무인지라 관리를 하지 않으면 금방 건조해져 금이 가거나 부서질테니까. 그게 떠돌이 용병으로서의 일과였다면, 용병의 동료이자 친구인 반려 새 피요르의 일과는 날개를 고르고 부리를 날카롭게 가다듬는 일이었다.

'응, 새에게 날개와 부리는 중요하지.'

서로 나름대로의 일과를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클라인의 목소리였다.
아나스타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와도 괜찮다고 말하며,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흰색 꽃을 한 아름 안고 있는 클라인이 나타났다.

 

"히아신스네요."


"이 꽃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떠올라서. 받아주시겠습니까?"

아나스타샤는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그러자 클라인의 품에서 히아신스의 향이 짙게 올라왔다.

"꽃을 주시려고 직접 걸음해 주신 건가요?"

클라인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아나스타샤를 한 번 더 뵙고 싶었습니다."

 

"네, 네?!"

 

당황해하는 아나스타샤와는 달리 클라인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어 보였다.

 

"같이 정원 산책은 괜찮으신지요."

 

"아, 아…… 정원 산책이요?"

 

'분명 아침 산책을 같이 하고 싶어서 보고 싶다고 한 걸 거야. 이게 전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오해 살만하게 생긴 미모라 그래…….'

 

정신을 가다듬고 저택의 정원을 떠올렸다. 카스펜서 저택의 정원이라면 어제 저녁 식사 후 복도의 창 밖으로 얼핏 봤다. 저택의 뒤 편에 꽃이 만발한 정원 아니었나.
자신에게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쨌든 녹음이 짙은 꽃밭은 퍽 아나스타샤의 취향에 맞았다.


아나스타샤가 산책을 승낙하자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잠깐 머뭇댔지만, 곧장 의도를 파악하고 재빨리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피요르는 정원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원의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녔다. 정원은 건물 안에서 볼 때보다 더 웅장했다.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낮은 나무와 꽃만 있는 것이 아닌, 거대한 나무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정원이 더 맘에 들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특히 이 나무가 맘에 드네요."

아나스타샤가 가리킨 건 정원 구석에 있는 작은 유칼립투스였다.

정원 하늘을 날아다니던 피요르는 아나스타샤의 손짓에 그 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이 나무, '아나스타샤'라고 부를까 봐요."

그 말에 클라인이 쿡쿡 웃었다.

"꼭 이 나무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정원을 둘러봤는데, 대부분 사과나무 아니면 참나무 종류더라고요. 이 친구 혼자서 독특한 나무던데."


"이 주변에서 자생하는 나무가 아닌 거친 숲에서 가져온 나무로 알고 있습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 나무, 거친 숲처럼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곳에 옮겨심으면 나중엔 이 정원의 나무들 중 가장 크고 아름답게 자랄 거예요. 지금은 작지만 제일 성장 가능성이 큰 친구죠.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클라인은 온화하게 웃으며 나무를 바라봤다.

"그래, 아나스타샤. 멋지게 성장할 때까지 내가 곁에서 잘 돌봐주마."

그 말에, 누가 봐도 홍당무가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나스타샤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저, 저 혼자서 부르는 애칭이거든요……! 클라인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요!"

 

"저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듭니다."

 

클라인은 유칼립투스 나무를 계속 '아나스타샤'라고 불러댔다. 결국 아나스타샤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싼 채로 정원 안쪽으로 도망쳤고, 클라인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그 뒤를 쫓았다.

 

후일이지만, '아나스타샤'의 위치는 클라인의 지시로, 그의 집무실에서 잘 보이면서 햇살이 잘 드는 쪽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다음이야기

 

300x250
반응형

Info

황제의길 프롤로그1 13시대 1230년 열의의 달 3월 10~15일
붉은흙1~2 3월 16일, 붉은흙3 3월 17일
황토젤리 3월 18~19일
엘돌란1~3 20일, 엘돌란3~7 21일, 엘돌란8~10 22일
황금요새1~2 23~24일 황금요새3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