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길 - 교살하는 바다8

TRPG/제 13시대

2021.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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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은 왔다. 눈부셨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김 선영, 시간을 파는 상점 中



"저 그림자는 뭐였죠? 흑마술사?"
"어쩌면 악귀술사 본인이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의 몸에 정신만 보낸걸 수도 있어요."

고된 싸움으로 지친 코스모스가 아나스타샤의 질문에 답해줬다.

"아,악귀술사?!"

그 외침은 절벽 위에서 들려왔다. 나다였다.

"뭐야, 네 고용주들일거아냐? 몰랐어?"
"몰랐어! 그런줄 알았으면 굳이 받아들이지 않았을거야! 악의 표상들과 직접적으로 얽혀서 좋을 것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근데 우리 할 얘기가 많지 않아? 내려와 보겠어?"
"왜, 왜! 난 할 얘기 없어……!"
"네 발로 내려올래, 아니면 내가 직접 내려줄까?"

나다는 묵묵히 절벽 아래로 낙하마법을 이용해 내려왔다.

"배신한건 아니야. 너희 내 전서 봤잖아?"
"봤지. 근데 내가 부탁한건 그게 아니였잖아. 분명 난 너한테 의뢰를 맡긴 자에게 연락이 오면 알려달라고 했을텐데. 네가 직접 만나는게 아니라."
"그,그건…."
"솔직히 말해. 사실 전 의뢰인에게도 나에게도 이중으로 돈 떼먹으려다가 이렇게 된 거 아냐?"

아나스타샤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나다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돈은, 말했던대로 줄게. 뭐 어찌되었던 피리긴이랑 이니고를 노리는 녀석들을 해치웠으니까."
"정말이야?!"

아나스타샤는 주머니에서 제국의 상징이 새겨진 금화 5개를 꺼내 건넸다.

"그래서, 이 돈도 당신 혼자 꿀꺽할 셈인가요?"

금화에 눈이 반짝이는 나다를 보며 바를로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 정도는… 안 그래."
"후후, 과연 그렇군요."


만남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정말 이번에도 신세를 졌소. 이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전부 내 탓이오."
"협박한 놈들이 잘못한거죠. 거기다 죽을 뻔 하셨잖아요."
"그래도 나를 위해 남을 팔아먹는 짓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거 보게나.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다 그런다니까."
"당신은 좀 닥치고 있지??"

아나스타샤는 끼어드는 이니고를 짜증난다는 듯이 가방 속에 쑤셔넣었다.

"괜히 과거의 감정이 살아날까봐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역시 인생은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구려."
"하지만 이 꼴이 되었으니 나름대로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죠. 아무리 원해도 이젠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테니."
"그런가. 그렇담 좀 안타깝기도……."
"안타깝다고? 내가?? 아직 불사는 아니지만 늙지는 않는다! 네가 지금보다도 더 쭈그렁 영감탱이 되어도 난 그대로지. 하하!"
"…안타깝지는 않을지도."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이니고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지지 않도록 가방을 동여맸다.

"참, 배는 돌려드릴게요."
"어짜피 또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받아두겠소."

피리긴은 배를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두고, 헛기침을 몇 번했다.

"내 이빨은 사실 인공 치아라네."
"네??"

그 말을 하자, 배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 왜 갑자기 치아 고백을 하나 했더니, 배를 숨길 때도 비밀을 말해야 하나 보죠?"
"흠흠, 그렇다오."

피리긴은 부끄러워하며 아나스타샤들을 쳐다보지 못했다.

"이빨이 인공치아야? 티가 안 나는데."
"아도니스, 비밀이래잖아요. 묻는거 아니에요."

아나스타샤는 아도니스의 어깨를 살짝 건들며 타박했다. 하지만 그 물음엔 악의는 없었다. 그는 정말로 궁금한 것 같았다.

"꽤 심혈을 기울여 만든거지. 마법물품이거든. 덕분에 충치가 날 만한 음식은 못 먹지 않나."

하지만 대답을 한 건 이니고였다.
피리긴은 얼굴을 붉힌채 말했다.

"그렇소. 내가 만든 마법 물품이라네…."
"아니, 죄송해요."

아나스타샤는 아예 가방을 멀찍이 굴렸다.

"으아아아아……"

이니고의 비명 소리 역시 작아졌다.

"엄청 정교한데? 이걸로 사업해도 괜찮겠어."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하구려."

피리긴은 자신의 이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인공치아 자체에는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아도니스 역시 그의 인공 치아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나스타샤들은 오랜 뱃여행과 전투로 지쳐있었고, 피리긴은 그런 그들에게 이번에도 자신의 집에서 하루 묶을 것을 권했다. 피리긴은 이렇게라도 빚을 갚고 싶은 모양이였다.

"에잉, 쯧쯧.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식탁이 이게 뭐야? 자네가 검소한건 알았지만 너무하는군."

그 날 저녁은 피리긴이 준비한 버섯 스튜와 은색 만에서 잡힐 법한 은갈치를 토막낸 소금구이, 그에 곁들인 발사믹 식초 샐러드였다.
저번에도 식사를 대접받았었지만 피리긴은 대체로 채식위주의 식단으로 검소하게 밥을 먹는 편이였다. 그런 그에게 이 식탁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렸다고 할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제국의 평범한 서민들 사이에서는 고기반찬만 없다 뿐이지 상당히 풍족한 편이였다.

"어짜피 넌 먹지도 못하면서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신경쓰지 마세요, 피리긴씨. 갈치가 참 맛있네요."
"맛있다니 다행이구려. 그 갈치는 직접 은색 만에서 낚은거지."

피리긴은 익숙하다는 듯이 이니고의 말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럼 조심하세요!"
"고맙소, 잘 가시구려."

아나스타샤들은 피리긴의 집을 뒤로하고 뉴포트로 향했다.

"드디어 집에 돌아가네요. 한동안 푹 쉴 수 있겠어요."
"그러게요. 액시스까지 배를 타면 하루만에 갈 수 있을테니, 다음 연회까지 2주는 여유가 생기네요. 이것저것 일이 많았는데도 금방 끝났어요."
"어… 배요…?"
"네, 배. 아…, 아도니스는 뱃멀미가 있었죠."
"아,하하…. 으…….참아보도록 힘내볼게요."
"음, 레몬이 멀미에 좋다는데 뉴 포트에서 몇 개 사가도록 해요. 틈틈히 먹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그런다면 좋겠지만…."

아도니스는 배를 탈 생각에 벌써부터 얼굴이 파래져 있었다.

'흠, 되도록이면 앞으로 뱃여행을 자제해야겠는걸.'

"이번엔 액시스로 가는겁니까~ 저는 수도는 처음이라 긴장되는군요."

바를로는 뉴 포트든 액시스든 새로운 장소로 가는 사실이 마냥 즐거워 보였다. 그런 그를 보니, 아나스타샤는 지금껏 하지 못했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보니, 넌 집에 안 가도 되는거야? 본가…는 그렇다쳐도, 네 부하들이 걱정 안 돼? 고향이 그립지는 않고?"
"으음, 저는 여기가 더 좋은데요. 이곳저곳을 모험하는건 정말 재밌다고요. 거기다가 제 부하들은 제가 없어도 알아서 잘 해내고 있을겁니다. 설마 누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가 떠나길 바라는겁니까?"
"아니, 내가 언제부터 스승이였다고……. 뭐, 나도 네가 돌아간다고 하면 아쉬울 것 같기는 해."

아나스타샤의 대답에 바를로는 기분 좋은 듯이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능글 맞게 웃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아도니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부풀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헤헤."
"그럼 쌍검술말고도 마법은 어때? 내가 잘 가르쳐줄테니까."

아도니스가 선의로 저런 말을 할 리 없었다. 그저 아나스타샤에게서 바를로를 떼어놓기 위해 하는 말이겠지. 최대한 악의가 없어보이는 표정으로.

"이런…, 제가 마법에 얼마나 재능 없는지 아신다면 마법사님도 그런 소리 못하실텐데요."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마법이란건 재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건 노력이야. 무슨 일이든 다 그렇겠지만."
"맞는 말이죠. 근데 전 지금으로서는 마법보다는 쌍검술이 더 좋군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법사님."

바를로 역시 능숙한 말투와 행동거지로 예의바르게 거절했다.

'저런 행동이 어디서 기인된건가 했더니, 이젠 대충 짐작이 가네. 어릴 때 집안에서 교육 받았던거겠지.'

여행을 하며 좋은점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모습을 알게 되는 점 아닐까? 그렇듯이 아나스타샤는 아도니스와 바를로에 대해 알게 되어가는게 좋았다. 지금껏 혼자 제국을 돌아다니면서 겪을 수 없던 점이니까.


번화한 동부 도시 뉴 포트

제국의 땅 너머로 어스름한 빛이 비출 때, 뉴 포트의 성곽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곳에 가까워질수록 제국 동부에 왔다는 느낌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액시스나 다른 작은 도시들에게서 볼 수 없는 회색의 화강암 벽돌로 쌓아올린 담과 붉은색 옻칠이 된 화려하고 전통적인 목재 기반의 건물들, 주로 벽돌이나 슬레이트로 되어있는 서부의 지붕과는 다른 형태의, 모자를 쓴 것 같은 모양의 노란 지붕. 아예 다른 세계에 왔다고 착각할만큼 낯선 풍경이였다.
아나스타샤들이 들어선 뉴 포트 외곽의 마나하타 마을은 타지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와……. 예쁘다. 건물도 독특히니."
"서부의 도시들보다 훨씬 자연친화적이고 아름답군요."
"그러게요. 거친 숲과 여왕의 숲의 영향일까요? 그런데도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할 수 있다는게 놀랍네요. 뉴 포트 안 쪽은 얼마나 화려할런지."

모두들 거리를 둘러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누가봐도 이들이 이 곳에 처음 방문했다고 알 수 있었을것이다.

"뉴 포트라고? 거긴 구경할거리가 많은 곳이지. 나도 보고싶다, 좀 꺼내줘!"
"말하는 청동머리를 들고 다녔다가 사람들이 수상하게 볼 걸?"

이니고는 계속 칭얼거리며, 소리쳤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여! 그쪽분들, 탕후루 하나씩 어때? 이게 또 뉴 포트의 별미거든. 한 시간은 더 걸어야 갈 수 있는 뉴 포트에서 먹을 수 있는걸 여기서 미리 맛 볼 수 있지!"
"우,우와……."

아무래도 아나스타샤들의 어리숙한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길거리 음식을 파는 상인이 그들을 불러세웠다.
아도니스는 뒤를 돌아, 그 상인의 수레에 담긴 반짝이는 딸기 꼬치를 보고는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말인가! 자네들, 차단은 먹어봤는가? 이게 그냥 계란이 아니네. 무려 자스민 차에 끓여 향기롭고 달콤한 계란이지!"
"하! 그래봤자 계란."
"그래봤자 딸기지!"
"아, 저기……"
"손님들 어떤게 더 먹고싶어?!"
"원한다면 둘 다 먹는건 어떤가!"
"오오! 그것도 좋네!"

너무 이방인의 면모를 보인 탓일까, 아나스타샤들의 주변에 장사꾼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아아, 나중에, 나중에 먹을게요!"
"하지만 저 탕후루는 먹어보고 싶은…, 앗! 아니, 다음, 다음에 먹어요."
"그럼 탕후루 5개…."
"예이~ 알겠슴다! 탕후루 5개~"

아나스타샤들은 개당 4cp의 탕후루를 손에 들고서야, 탕후루 상인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탕후루는 과일에 물엿을 입힌 간식거리였는데, 딸기, 청포도, 키위, 산사나무 열매 등 종류가 다양했다.

"우물우물, 확실히 본 고장에서 먹는 탕후루는 색다르네요. 특히 이 알록달록한 색이 거리의 건물들과 잘 어울려요."

처음엔 별 감흥 없었던 아나스타샤도 막상 마나하타의 거리를 걸으며 먹는 길거리 음식이 맘에 든 모양이였다.

"이거 여관도 기대가 되네요. 음식도 맛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책에서 봤던 바로는 동부지방은 바닥에 누워 잔다고 하더군요."
"바닥이요…? 등이 조금 아플 것 같은데…. 음, 야영으로 단련되어 있으니까 괜찮겠죠."

클라인의 말에 아나스타샤는 잠자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굳이 돈을 내고 실내에서 자는 큰 이유 중 하나가 푹신한 침대였는데, 바닥에서 잘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 먹은 탕후루의 꼬치를 우물거리며 생각에 빠진 아나스타샤를 부른건 코스모스였다.

"저기는 어떠신가요?"

그가 가리킨 곳에는 소박한 갈색 목재 벽면에 검은 기와를 올린 건물이 있었다. 주변의 건물들에 비해 소박하지만 따뜻한 분위기였다. 미닫이로 된 출입구 안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맛있는 고기 냄새 비슷한 것이 저 안에서 풍기고 있었다.

"……흠흠, 꼭 냄새가 궁금해서는 아니고, 저기에 한 번 가볼까요? 소박한 건물은 또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아나스타샤뿐만 아니라 그들도 흥미로운 냄새에 관심이 갔는지 별 말없이 그를 따라 여관이 미닫이를 열었다.

 

 

다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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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

황제의길 프롤로그1 13시대 1230년 열의의 달 3월 10~15일
붉은흙1~2 3월 16일, 붉은흙3 3월 17일
황토젤리 3월 18~19일
엘돌란1~3 20일, 엘돌란3~7 21일, 엘돌란8~10 22일
황금요새1~2 23~24일 황금요새3 25일